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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ebzine 'Sn@pp'] 사랑, 왜죠?
    ODOD_One Day One Design 2012. 5. 8. 01:54

    남자는 다짜고짜 "우리는 이제 그만 만나는 게 좋겠어." 라고 말했다.

     

    아직 남자에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다음 주면 내 생일이었는데 이런 소리를 듣자니 내가 제일 먼저 드는 감정은 슬픔이었다.

     

    오늘의 계획은(사실 어제부터 우리는 온종일 함께 있었지만) 야구장에 가는 것이었다.
    사실 오늘 야구 경기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사실 없기를 더 바랬다.) 왠지 그와 함께 야구장에 가보고 싶었다.

     

    지난번 데이트 때, 한강에 자리를 깔고 누워 야구장에 관한 이야기를 했었던 것도 같다.
    남자는 야구에 흥미가 없다고 했다. 나도 역시 그렇다고 했다. 하지만 고등학교 시절 나는 발야구 1번 주자였던 것이 생각나서 그것을 말했다.

    남자는 사실 농구도 별로라고 했다. 축구도 별로라고 했다. 운동을 싫어하는 남자는 좀 의외였다.

     

    나는 여태껏 공을 싫어하는 남자를 본 적이 없다.

    (내가 만나왔던)대부분 남자들은 야구, 그리고 그것보다 더 많은 남자가 축구를 좋아했다.

    심지어 어떤 남자들은 토요일에 나와 잠을 자고 일요일 아침 조기 축구회 형의 전화에 혼자 나갈 채비를 하기도 했다. (나는 주로 남아서 잠을 더 잤다.)

     

    그런 아침 혼자 모텔 방에 누워있으면 뭔가 홈런을 내 준 투수와 같은 마음을 알 것도 같았다. 사실 잘 모르겠다. 나는 가끔 투수와 포수란 단어도 헷갈린다.

     

    그래, 어쨌든 다시 야구장.

     

    나는 남자에게 오늘은 '우리 이제 그만 침대에서 일어나서 야구장에 가는 것이 어떻겠어?'라고 말할 참이었다.

    창문으로 보이는 날씨가 하늘에 포물선을 그리는 흰 공을 보기에 안성맞춤인 날씨였다. 아니라면 튤립. 경기장 근처 화단에 핀 색이 붉은 튤립을 보기에도 좋은 날씨였다.(시각은 오후 1시였다.) 그런데 내 말을 듣기도 전에 남자는 다짜고짜 "우리는 이제 그만 만나는 게 좋겠어." 라고 말했다.

     
    일단 그 이유를 들어보기 전에 먼저 샤워를 좀 하고 오겠다고 했다.

    보일러에 목욕버튼을 누르고 기다렸던 3분 정도의 시간 동안 나는 어떤 말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다행히 나도 남자도 아무 말이 없었다.

    그리고 평상시와 다름없는 샤워를 하고, 양치도 하고 새로운 속옷과 티셔츠를 갈아입고 남자 옆에 앉았다.

     

    "왜죠?"

     

    남자의 얼굴을 보고 단 두 마디를 했다.

    축구도 싫어하는 남자였다. 게다가 행여나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어느 조기 축구클럽에 가입이 돼버렸다고 하더라도 오늘은 일요일도 아니었다. 대체 그 이유를 한번 들어보고 싶었다. 남자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목욕 버튼은 아직 눌러져 있니?"

     

    원하는 답이 아니었지만, 나는 일단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남자는 그렇다면 먼저 샤워를 좀 하고 오겠다고 했다. 그리고 몇 분이 지나고 젖은 머리칼을 하고 방에 나타났다.

     

    "그런데 드라이어는?"

     

    "고장 나서 지난주에 버렸잖아. 그리고는 아직 못 샀어."

     

    남자는 그럼 어쩔 수 없지 하는 표정으로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털고 있었다. 나는 더는 기다릴 수가 없어져서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왜죠? 왜? 왜?"

     

    남자는 여전히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털면서 말했다.

     

    "충분했다고 생각해."

     

    "뭐가?"

     

    "나는 너를 충분히 사랑했어. 오늘 너를 보니 그런 마음이 들었어. 충분히 사랑했고, 물론 지금도 사랑을 하고 있지만, 이제는 내 마음을 충분히 알 것 같아. 그래서 이제 그만 만나도 괜찮을 것 같아. "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내가 슬픔, 황당함. 다음으로 느낀 감정은 복잡함이었다. 복잡함에는 새 드라이어를 사야 한다는 사실에 대한 짜증과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남자의 태도에 대한 더 큰 짜증 그리고 결국 우리는 오늘 야구장을 못 가는 건가? 하는 불안함과 아쉬움이 있다.

     

    "음식을 충분히 먹었을 때의 포만감같은거야. 예전에는 널 보면 항상 내 마음이 모자라는 느낌이 있었지. 그래서 자꾸 보고 확인하고 싶었어. 사랑이라고 말하기엔 아직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들어서 계속 너를 만났던거야. 그런데 오늘 일어나서 옆에 누운 너를 보고 있으니 문득 확신할 수 있겠더군. 이것은 사랑이 분명하고, 아주 충분한 느낌. 그래서 앞으로 너를 더 만나지 않아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걸 확신할 수 있을 것 같아."

     

    "변명하지 마. 지금 네 말이 어쨌거나 아침에 여자를 두고 조기 축구에 나가는 남자와 다를 게 뭐 있어? 처음 몇 번은 항상 먼저 조기축구 회장 형의 전화를 꺼버리지. 여자들이 안 나가봐도 돼? 하면, 신경 쓰지 마. 나한테 니가 더 중요해. 하면서.. 결국 아침에 한 번 더 섹스하려고 했던 거잖아. 그런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결국 눈을 떠 보면 옆에 없는 거지."

     

    "귀여운 생각이긴 한데, 진짜 아니야. 나는 축구를 좋아하지 않아. 믿어도 돼."

     

    남자는 옷걸이에 걸린 옷을 차례차례 입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내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는 이마에 입을 맞추고 방문을 열었다.

     

    "저기 종이 가방 보이지? 그거 선물이야. 그리고 나는 지금 너를 정말 사랑해. 그래서 앞으로 여기 올 일은 없을 거야."

     

    그리고 내 방을 나갔다. 이제 나는 기가 막히게도 머릿속에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떤 감정도 없었다. 멍 - 한 느낌. 멍 - 한 느낌을 어떤 감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남자가 바닥에 떨어뜨리고 간 수건을 주워서 내 머리카락을 닦았다. 그리고 방 한구석의 종이가방을 열었다.

    운동화 박스같은 검은 박스에는 하얀 드라이어가 들어 있었다.

     

    '마지막 선물치곤 멋대가리가 없구만.'

     

    나는 당장 부엌으로 가서 설거지통에 담긴 주방 가위를 들었다.
    욕실 거울 앞에 서서 젖은 머리칼을 한 움큼 쥐고 채소를 자르듯 싹둑싹둑 자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세면대가 미용실 바닥처럼 변했다. 그리고 나는 남자가 선물로 준 드라이어를 켜서 남은 머리칼을 말리기 시작했다.

     
    욕실의 작은 창으로 들어오는 오후의 빛과 하얀 드라이어의 미풍. 그리고 내 손끝에 만져지는 잔디처럼 짧은 머리카락의 감촉.

    왠지 텅 빈 야구장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RD(@RDRDRDRDRDRD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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